나는 다섯 가지 불효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다섯 가지 불효에서 자유로운가?
모든 부모는 한결같이 자식을 사랑하고 있다. 세상의 자식 된 모든 이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의 10분의 1만큼만 그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도 그는 천고의 효자가 될 것이다.
이 효는 인(仁)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우리 삶 속에서 인(仁)은 사랑의 원천이며 모든 선(善)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仁)은 우리 전통의 유교사상의 중심이 되며 인(仁)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인(仁) 즉 사랑은 부모를 섬기는 효(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가 오랜 세월 동안 소중히 여겨온 수신서(修身書)이며, 삶의 지표로 삼아 왔던 어록(語錄)인 명심보감(明心寶鑑)의 효행편(孝行篇) 첫머리에 있는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 애애부모(哀哀父母) 생아구노(生我劬勞) 욕보심은(欲報深恩)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고 했다. 즉 ‘어버이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슬프고 애달프다. 아버지 어머니시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시고 수고하셨네. 그 깊은 은혜를 갚으려면/ 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네./라고 하였다.
이 가르침은 부모의 깊은 사랑과 노고를 기린 시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는 부모의 무능함을 탓하고 외면하거나 부모를 외딴곳에 갖다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돈과 재물 때문에 부모를 내쫓고 죽이기까지 하는 패륜아가 있는 요즘에, 부모의 은혜는 깊어 갚고 갚아도 끝이 없으니 잘 섬기자는 말이며 자식 된 우리가 모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우리는 부모님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 그리고 ‘부모유 기질지우(父母唯 其疾之憂)’라고 했다. 즉 부모는 오직 그 자식이 병들 것을 조심한다. 라는 뜻이니 부모의 자식 사랑은 참으로 지극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도 마땅히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구한말 최익현 같은 분은 한나라 재상 지위에 있었지만, 몸소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에 군불을 때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며, 김영삼 전직 대통령도 재임 시에 조석으로 멀리 게시는 부모님께 전화 문안을 드린다는 방송을 들은 바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서구문명과 풍습이 밀물처럼 여과 없이 밀어 들어오면서 극도의 개인주의가 만연되어 부모를 모시고 한집에서 사는 것조차도 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핵가족화가 급속화 되어 노부모들이 외로이 사는 것이 당연한 일로 변해가고 있다.
늙고 병든 부모를 정성 들여 봉양하는 미풍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도시에는 노인 요양원이라는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퍼져가고 있고 수많은 노인이 이런 요양원에서 보호 또는 치료받고 있고 이런 업종이 성업을 이루며 수많은 노부모를 자식이 직접 봉양 못하고 이런 요양시설에 의탁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요양시설에 의탁 되어 요양을 받는 분들은 노후에 경제능력이 있거나 자녀가 경제적 여유가 있고 그래도 효심이 제대로 살아 있는 자녀를 둔 노인들이다.
우리의 효사상도 세월 따라 이렇게 많은 변화를 하고 있으며 효라는 가치관을 재정립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에 힘써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자고로 효를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나누는데 그 첫째가 대효(大孝)인데 부모를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이며 둘째는 부모님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셋째 제일 낮은 효가 부모님을 의식주(衣食住)로서 잘 봉양(奉養)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효는 미루지 말고 지금 곧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삶은 기약이 없으며 우리들의 효를 기다려 영원히 사시는 것이 아니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는 반드시 효를 낳는다고 한다. 내가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자녀가 보고 배워서 효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부모의 효행을 보고 배워서 효도를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전통적인 효의 가르침을 오늘의 시각에서 조명해 볼 때 지나친 점이 없지만은 않다. 그러나 효란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효를 되새겨 본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효는 바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부자자효(父慈子孝)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자(慈)는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것이고 효(孝)는 아래로부터 위로 발현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사랑을 미치는 효행을 할 줄 알아야 이웃 어른들도 공경할 줄 아는 겸허한 자세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을 마음으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모시겠다. 라는 마음을 간직하였을 때 이를 효심(孝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마음속의 정성을 부모님을 향해 행동으로 옮겼을 때 효행(孝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효심(孝心)’과 ‘효행(孝行)’을 바탕으로 하여 바람직하게 부모에 대한 자기품성을 정성스럽게 나타낼 때 이것을 효덕(孝德)이라고 하며 이와 같은 효심과 효행과 품성, 효덕 등의 제요소를 조화롭게 생활화하여 인간의 본질에 자기의 성질을 다할 때 비로소 효도(孝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 효가 돋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효한 행위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孟子)는 소학(小學)의 제2장 효도의 가치관에서 세속(世俗)에서 불효라고 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게을리하여 부모의 봉양(奉養)을 잘하지 않는 것이 첫째 불효이고, 장기바둑 등 도박을 일삼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둘째 불효이며, 재물을 탐내고 자기 처자식만을 사랑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셋째 불효라고 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싶은 욕망과 귀로 듣고 싶은 욕망에만 방종하여 부모에게 수치와 욕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넷째 불효이고, 용맹(勇猛)을 좋아하고 사리분별 없이 함부로 날뛰며 성 내고 싸움질하여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다섯째 불효라고 가르치고 있다.
맹자가 말한 위 다섯 가지 불효에서 가르치고 있는 효를 생각해 보면 첫째 효는 근면 성실하여 부모님을 잘 봉양하라는 가르침이고, 둘째 도박이나 오락 등을 삼가고 금주하고 절주하여 부모님을 잘 봉양하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재물에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 처자보다 부모님을 우선하여 보양하라는 가르침이며, 넷째 남에게 지탄받는 행동을 삼가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가르침이고, 다섯째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항상 온화한 표정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려라 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경계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대목이 재물을 좋아하며 자기 처자만 생각하고 부모님을 저버리는 불효일 것이다. 이 세상은 황금만능주의가 범람하여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재물에 눈을 밝히면 부정과 비리와 범죄를 유발하게 되고 돈을 최고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가치판단을 돈으로 평가하려는 한심한 작태를 저지르게 되며 이러한 행위는 위의 세 번째 불효로서 이 시대에 가장 경계하고 각성할 대목일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불효의 기준은 천륜의 도리이므로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각자 자신을 냉철히 성찰해 보면 이 다섯 가지 기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자신을 반성하여 이 같은 불효가 있을 때 과감하게 고쳐야 할 것이다.
실버넷뉴스 김춘원 기자 kimcw98@silvernetnews.com